[김대중 평전 '새벽'·47] 햇볕과 광풍
기사입력 2012-06-21 오전 10:09:57
햇볕과 광풍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그런데 당선자가 나오지 않았다. 민주당 후보 앨 고어와 공화당 후보 조지 부시는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러면서 개표 과정이 투명하지 못했고, 부정선거 시비도 일었다. 결국 미국 대통령이 법정에서 탄생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35일 동안의 치열한 공방 끝에 연방대법원은 부시의 손을 들어줬다. 5대 4의 판결이었다. 민주 국가 최대의 축제인 선거가 망가졌고, 미국인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김대중은 이를 비상하게 챙겨보고 있었다. 고어는 클린턴 정부의 대북 정책을 이어받을 것이지만 부시는 알 수 없었다. 김대중은 클린턴의 북한 방문을 고대했다. 그의 임기 중에 북미 관계가 개선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공화당은 클린턴의 방북을 반대하고 있었다.
"세계 최강의 미국 대통령이 불량국가의 사악한 독재자를 찾아간다는 것은 미국의 자존심에 심각한 손상을 주는 행위이다."
그러던 12월 21일 클린턴이 청와대로 전화를 걸어왔다.
"아시다시피 이곳의 애매한 선거 결과로 후임자와 상의할 수 없음에 귀중한 시간만 소비했습니다. 동시에 중동 평화와 관련한 대화가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결론지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북한 방문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클린턴은 훗날 이때 상황을 자서전 <마이 라이프(My life)>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나는 북한과의 협상을 진척시키고 있었지만, 중동 평화 협상의 성사가 임박한 상황에서 지구 정반대편에 가 있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아라파트가 협상 성사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면서 북한 방문을 단념할 것을 간청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북한 방문을 강행할 수 없었다."
클린턴은 12월 28일 북한을 방문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그리고 편지를 보내 김정일을 워싱턴으로 초청했다. 북한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어쨌든 미국은 북미 공동 선언을 이행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탄식했다. 고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면, 클린턴이 북한을 방문했다면, 김정일이 못이긴 척 클린턴의 초청에 응했더라면, 중동 평화 회담이 그 때 열리지 않았다면 한반도에는 새로운 역사가 펼쳐졌을 것이다. 훗날 퇴임 후 김대중을 만난 자리에서 클린턴도 이렇게 술회했다.
"제가 1년만이라도 더 대통령으로 있었더라면 북한 위기가 해결됐을 겁니다."
역사에는 그래서 가정이 없다. 엄혹한 현실만이 있을 뿐이었다. 부시의 등장으로 한반도는 다시 얼어붙고 있었다. 김대중과 부시, 한 사람은 햇볕이었고, 다른 한사람은 광풍(狂風)이었다.
김대중은 3월 6일 미국을 방문했다. 취임 후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 한국 대통령을 초청했다. 김대중은 부시 행정부가 어떤 외교 노선을 선호할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햇볕정책 지지 여부가 관건이었다. 정상 회담에 앞서 국무장관 콜린 파월과 조찬을 함께 했다. 파월은 햇볕 정책을 적극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대통령 부시와 정상 회담을 가졌다. 김대중은 햇볕 정책을 자세히 설명했다. 부시도 이에 화답했다.
"김 대통령께서 이룩한 남북 관계 진전을 높이 평가합니다. 미국 정부는 대북 포용 정책을 적극 지지합니다."
회담은 이렇게 무리 없이 마쳤다. 김대중은 안도했다. 문제는 회담 후 기자 회견 때 불거졌다. 부시는 거친 표현을 동원 느닷없이 북한을 비난했다.
"나는 북한 지도자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북한이 모든 합의를 준수하고 있는지 확신이 없다."
"대북 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겠다."
부시는 김대중의 답변도 가로챘다. 또 디스 맨(This man)이라 호칭했다. 김대중은 매우 불쾌하면서도 불길했다. 부시의 회견 내용을 듣고 있던 국무장관 파월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을 번복하는 회견을 가졌다. 콜린은 정상 회담 때까지 부시의 의중을 잘못 읽고 있었다. 부시는 네오콘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부통령 딕 체니,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 등이 대북 강경책을 주도하고 있었다. 클린턴과 민주당의 노선을 노골적으로 부정했다. 'ABC(Anything But Clinton)'라는 신조어가 나돌 정도였다. 즉, 클린턴 대통령이 해놓은 것들은 모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황당하고도 분했다. 그날 통역을 맡았던 강경화(그녀는 빼어난 실력으로 한·미 양국의 신뢰를 얻었다)는 그날 김대중의 얼굴이 매우 어둡고 슬퍼보였다고 회고했다. 그렇지만 김대중은 반드시 부시를 설득해서 그를 굴복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음날 클린턴에게 전화를 했다. 클린턴은 김대중을 따뜻하게 감쌌다.
"오늘 <뉴욕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 주요 언론들 보도도 '한반도에 관해서는 결국 신 행정부가 클린턴 노선을 계승할 것'이라는 논조가 큰 흐름이라고 합니다. 일정 기간 검토가 끝나면 대통령께서 시작하신 일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대통령께서 부시 대통령에게 유용한 조언을 많이 주셨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러나 클린턴은 전직이었다. 그의 정책들은 부시 행정부가 구겨서 버리고 있었다. 한반도에 거주하는 한민족의 운명이 이렇듯 멀고 먼 강대국의 입김에 좌우되고 있었다. 김대중은 그날의 수모를 잊지 못했다. 부시 또한 그날의 무례를 잊지 않았다. 부시는 2004년 외교부 장관 반기문을 통해 사과했다. 김대중도서관을 찾은 반기문이 김대중에게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2001년 정상회담 때의 일을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져 내렸다. 지구촌을 온통 충격에 빠뜨린 9·11 사태였다. 미국의 하늘이 뚫렸다. 힘의 상징인 국방부 청사가 불에 탔다. 미국인의 자긍심도 불에 타버렸다. 분노한 부시는 보복 공격에 나섰다. 테러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각국에 동참을 강요했다.
"미국편에서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테러리스트 편에 설 것인가."
미국에 줄을 서면 선이었고, 이탈하면 악이었다. 그리고 9·11 테러의 불똥은 한반도까지 날아왔다.
2002년 1월 말 부시는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으로 지정했다. "선제공격으로 정권을 교체시켜야할 대상'이라 선언했다. 북한은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하며 즉각 반발했다. 북한과 미국 관계는 다시 무력 충돌 위기로 치달았다.
부시의 "악의 축" 발언에 남쪽에서도 반미 감정이 일어났다. 미국의 무력 사용은 한반도의 전면전을 의미했다. 김대중 정부는 과거 군사 정권과 달랐다. 국민의 선택한 민주 정부였다. 한국 내 반미 감정이 일고 있음은 미국에게도 커다란 부담이었다. 마침 2월 하순 부시의 한국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다. 김대중은 정상 회담을 통해 부시를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철저하게 준비했다. 김대중은 벼르고 별렀다.
2월 20일 아침, 마침내 김대중과 부시가 마주 앉았다. 정상 회담은 예정 시간보다 무려 한 시간을 초과했다.
김대중은 햇볕 정책을 다시 설명했다. 그리고 북·미 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처음에는 부시도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김정일 위원장은 자기 백성을 굶주리게 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악랄한 독재자입니다. 북한에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어 북한 체제를 붕괴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김 위원장은 서울 방문 약속을 왜 지키지 않는 것입니까."
부시의 공세적 질문은 김대중에게는 호기였다.
"레이건 대통령이 러시아를 '악의 제국'이라 지칭했지만 데탕트를 추진했습니다. 닉슨 대통령은 중국을 '전범'으로 규탄하면서도 중국을 방문하여 개혁 개방을 유도했습니다. 친구와의 대화는 쉽고 싫은 사람과의 대화는 어렵지만 국가를 위해, 필요에 의해 대화할 때는 해야 합니다. 미국은 한국 전쟁 때 공산당과도 대화를 했습니다.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고 살길을 열어주면 북한은 핵과 대량 살상 무기를 포기할 것입니다. 북한에 기회를 주십시오."
부시는 "좋은 유추"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김대중은 햇볕 정책 이후 남북이 상호 비방 및 도발 중지, 이산가족 상봉, 인적 왕래 증가 등 가시적인 성과가 있음을 설명하고 국민의 80퍼센트가 이를 지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햇볕 정책은 유화 정책이 아닙니다. 강자만이 추진할 수 있는 공세적 정책입니다."
김대중은 휴전 이후 처음으로 북한의 군사 도발을 응징한 연평해전을 예로 들면서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데탕트를 추진하고 있음을 주지시켰다. 또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한 것인지도 지적했다.
"우리 국민은 전쟁에 단호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해 미국의 군사적 조치는 곧 전면 전쟁으로 확전될 것이 분명합니다. 펜타곤은 전쟁 발발 3개월 내에 한국군 50만 명, 미군 5만 명, 민간인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산업 시설의 대부분이 파괴 될 것으로 예측한 바 있습니다. 전쟁은 우리가 승리하겠지만 이러한 참화는 막아야 할 것입니다."
김대중은 최선을 다해 부시를 설득했다. 그것은 부시의 대북 정책이 얼마나 단견인가를 지적하는 가르침이었다. 태도는 겸손하고 정중했지만 그 속에는 창이 숨어 있었다. 김대중은 공격에 부시는 마땅한 방패가 없었다. 부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해했다." "지지한다" "좋은 지적이다" 등 뿐이었다. 부시는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을 다시 봤다. 2001년 워싱턴 회담에서 한국을 변방으로 보고 김대중을 그저 그런 지도자로 봤던 자신의 시각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회담이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길어지자 밖에서 기다리는 한·미 양국의 외교관들은 극도로 긴장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회담이 끝나고 양국 정상이 나타났다. 그때 부시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평소 천진한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미국 외교관들은 그걸 보며 의아해하거나 불안해했지만 한국 수행원들은 내심 안도했다. 청와대 비서 김선흥은 당시의 부시 모습을 이렇게 술회했다.
"교무실에 불려가 주의를 단단히 듣고 나오는 학생의 표정 같았다."
정상 회담을 마치고 공동 기자 회견장에 나온 부시는 '김대중의 학생'이 되어 있었다.
"햇볕 정책을 적극 지지한다."
"북한을 침공하거나 공격할 의사가 없다."
"북한 주민에 대한 식량 지원을 계속하겠다."
그날 밤 만찬이 있었다. 김대중은 포도주 잔을 들어 건배 제의를 했다. 부시는 자신이 크리스천이라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며 포도주 대신 별도로 준비해온 맥주로 건배했다. 알콜 성분이 없는 것이었다. 김대중이 물었다.
"어느 교파 소속이신지요."
"감리교입니다."
그러자 김대중은 산업 혁명 이후 감리교가 영국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 설명했다.
"산업 혁명 이후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나와 빈민이 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열악한 근로 조건에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의 위기에서 영국을 구출하여 19세기 찬란한 빅토리아 왕조 시대를 열게 만든 세 부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언론이고, 둘째는 법원이요, 세 번째는 감리교였습니다.
당시 성공회는 왕족이나 귀족들만의 종교로 대중의 고통을 외면했습니다. 존 웨슬리가 감리교를 창시해서 성공회가 외면한 사람들을 품어줬습니다. 불만과 분노에 찬 이들을 위로하고 희망 속으로 이끌었습니다. 감리교가 영국을 구원한 것입니다. 대통령께서 믿는 감리교가 그래서 위대합니다."
부시 내외는 진지하게 경청했다. 김대중의 박식함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한미 정상 회담은 김대중의 뜻대로 마무리 되었다. 국내외 언론들도 성공적인 회담이라 평가했다.
김대중은 또 다시 최선을 다했다. 부시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었다. 김대중 자신이 한 말처럼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악마와도 대화를 해야 했다. 부시는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정권 교체와 선제공격의 대상"이라 공언했지만 "공격할 의사가 없다, 지원을 계속하겠다"고 입장을 번복했다. 한 달도 채 안된, 연두교서의 잉크도 마르기 전이었으니 부시의 체면이 많이 구겨졌다.
그 후에도 미국은 대북 정책과 관련해서 냉탕온탕을 오갔다. 미국 대통령 부시는 네오콘들의 충동질에 즉흥적 조치들을 남발했다. 면전에서는 햇볕 정책을 지지한다 해놓고 돌아서면 딴 짓이었다. 말과 행동이 달랐다. 그 때마다 덜 익은 정책으로 한반도 전체가 요동을 쳤다. 김대중은 이런 부시를 경멸했다. 임기를 끝낼 때 쯤 김대중은 부시를 이렇게 평했다. 그 속에는 증오가 잔뜩 묻어있었다.
"우리는 철학이 없고 자질 부족한 극우 보수주의자인 부시 대통령 때문에 미국까지 포함한 세계가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가? 나는 2000년부터 2003년 퇴임 때까지 남북 관계 개선 발전을 위한 천금 같은 시기를 갈등과 정체 속에 보낸 것이 지금 생각해고 원망스럽고 애석의 심정을 금할 수 없다."
"한반도 문제는 2000년 6·15 정상 회담 이래 순풍에 돛 단 듯이 순항한 것을 2001년 부시가 들어서면서 지난 8년 동안 엉망을 만들었다. 부시는 철학도 일관된 정책도 없이 일을 어렵게 했다. 나라가 잘되려면 국민이 훌륭해야지만 지도자도 제대로 된 사람이 들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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