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5일 수요일

[일반] 어둠의 불법복제 커넥션, `씬`을 파헤친다 -2-

[일반] 어둠의 불법복제 커넥션, `씬`을 파헤친다

불법복제 제국 ‘씬’의 역사

‘씬(The Scene, 혹은 Warez Scene)’은 특정 사이트나 집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복제 된 소프트웨어들이 오가는 커뮤니티 전체를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릴리즈 그룹부터 P2P까지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복잡한 관계로 얽힌 구조로 되어 있는 ‘씬’은 다양한 소프트웨어의 불법복제 및 배포가 이루어지며, 그 규모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집단입니다.

▲ 이 시절부터 와레즈와 `씬`이 있었다는 뜻

‘씬’이라는 용어가 불법복제 커뮤니티를 가리키는 말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80년대로 추정됩니다. IBM PC가 지금처럼 주도권을 잡기 이전, 애플 컴퓨터와 코모도어 기종이 치열하게 싸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 경쟁에 IBM이 끼어들면서 PC가격이 크게 하락했고, PC가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PC의 보급률 증가는 자연스럽게 상용 소프트웨어 시장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이나 당시나 사람들의 저작권 의식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만질 수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소프트웨어를 굳이 돈 주고 사긴 싫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 마디로 복돌이) 이런 ‘불법복제’의 수요는 점차 늘어갔고,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따르는 법. 이런 복돌이 들을 위해 상용 소프트웨어를 불법복제 하는 집단-릴리즈 그룹-이 1980년경 처음 등장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씬’의 시초입니다.

▲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 가는 불편한 방식인 BBS

초창기의 ‘씬’은 모뎀으로 접속이 가능한 BBS(전자 게시판 시스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느슨한 커뮤니티였습니다. 이 당시의 BBS는 한 번에 하나만 접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급속하게 정보가 퍼지긴 어려웠고, 각 릴리즈 그룹은 자신만의 BBS를 열어 그 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여기에 직접 혹은 타 릴리즈 그룹이 릴리즈 한 불법복제 소프트웨어를 BBS에 올려놓고 다운받으려면 이용자에게 저렴한 비용을 요구하는 방식의 사업(?)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이 시기만 해도 다른 불법복제 커뮤니티와의 소통은 좀 힘든 시기였지요.

그러던 ‘씬’은 1990년대 중반 불법복제 BBS들이 철퇴를 맞으면서 크게 변화합니다. 1997년경, 불법복제를 뿌리뽑으려는 미 연방수사국(FBI)의 수사에 의해 불법복제 BBS 5군데가 폐쇄되었고 운영자들은 체포되었습니다. 전화 추적 기술이 크게 발달하면서, 집에서 자신의 PC와 모뎀으로 돌려야 하는 BBS로 불법복제를 시도하는 것은 자살행위가 되어버렸습니다.

불법복제 커뮤니티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집에서 BBS를 운영했다가는 언제 FBI가 대문을 박차고 들어올지 모르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불법복제를 안 할 수도 없고…(?) 그러나 하늘은 불법복제 커뮤니티를 버리지 않았는지, 불법복제 커뮤니티를 위해 복음과도 같은 기술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인터넷입니다.

위험하게 자신의 집에 BBS를 차릴 필요 없이, 법망이 미치지 못하는 저 멀리 사모아나 버뮤다에 서버를 두고 홈페이지를 운영할 수 있는 인터넷은 불법복제 커뮤니티가 성장하는 보증수표나 다름없었습니다. 게다가 인터넷 상에서 특정 유저를 추적한다는 것은 집 전화 추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FBI를 수사 당국은 골머리를 앓게 됩니다.

여기에 인터넷의 가장 큰 장점은 접속하기만 하면 중국, 미국, 일본 가릴 것 없이 전 세계 사람과 정보 교환이 가능하다는 것이었고, 이 장점은 불법복제 커뮤니티에 의해 ‘좀 더 빠르고 널리’ 불법복제 소프트웨어를 퍼트리는데 이용됩니다. 어제 미국에서 릴리즈 된 파일이, 이제 하루 정도면 태평양에 깔려 있는 통신 케이블을 통해 한국에 들어와 퍼지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인터넷의 보급과 더불어 수많은 불법복제 커뮤니티와 릴리즈 그룹이 이 시기에 등장합니다. 막 보급되던 CD-ROM 매체를 쉽게 불법복제 하기 위해 ‘립버전’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 입니다. 이후 전 세계 적으로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씬은 더욱 조직화되고 현재와 같은 규모로 성장하게 됩니다.

불법복제 제국의 가장 위: 릴리즈 그룹

불법복제 제국 ‘씬’의 가장 근원에는 릴리즈 그룹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씬’이라는 피라미드의 최상부에 위치한 이들은, 모든 불법소프트웨어(특히 게임)가 퍼져나가는 원천이며 락을 깨는 작업도 이 릴리즈 그룹에서 도맡아 합니다. 릴리즈 그룹의 특성상 대부분의 릴리즈 그룹은 인터넷 채팅(IRC)나 자신들의 사이트를 중심으로 은밀히 활동하며, 그룹 멤버의 오프라인 생활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있습니다. 같은 그룹에 속해 있는 멤버들끼리도 상대가 무슨 생활을 하는지 어디에 사는지 모르며 묻지도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입니다.

다른 범죄 조직과 마찬가지로 어떤 한 릴리즈 그룹이 온전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구성원이 모두 갖춰져 있어야 합니다. 릴리즈 그룹은 철저하게 분업화 된 조직으로 개인 간의 역할 구분이 뚜렷하기 때문에, 구성원이 하나라도 없으면 온전한 릴리즈 그룹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한 구성원이 여러 일을 맡아서 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릴리즈 그룹에는 다음과 같은 구성원들이 꼭 필요합니다.

리더(Leader)

리더는 말 그대로 릴리즈 그룹을 총괄하는 사람으로, 회사로 따지면 최고 관리직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리더는 어떤 소프트웨어를 타겟으로 삼아 ‘릴리즈’ 할 지 결정하고, 그룹 멤버들간의 여러 의견을 조율하는 중재자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리더는 릴리즈 그룹 멤버들에게 어떤 일을 ‘강요’하는 권한은 없습니다. 리더의 가장 큰 역할은 멤버들의 의견을 모으고 적절한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공급책(Supplier)

공급책은 릴리즈 그룹이 목표로 하는 소프트웨어를 입수하는 역할을 합니다. 공급책이 목표로 하는 소프트웨어를 얼마나 빨리 구하느냐에 따라 릴리즈가 결정되기 때문에 공급책은 릴리즈 그룹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만일, 어떤 그룹이 게임 릴리즈 그룹이라면 공급책의 제1목표는 최신 게임이 되겠고, 영화 릴리즈 그룹이라면 개봉 전의 영화가 되겠지요.

공급책은 여러 방법으로 원하는 목표를 손에 넣습니다. 인맥과 총판을 통해 발매 되기 전, 창고에 쌓여 있는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구하기도 하고 아예 회사 내부 인력-주로 임시직-을 매수해 소프트웨어를 빼돌리기도 합니다. 드물게 능력이 된다면 직접 회사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해 소프트웨어를 입수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아주 열성적인 공급책은 직접 관련 업종(소프트웨어 개발, 유통)에 임시직으로 취업해 소스를 빼돌리기도 합니다.

크래커(Cracker)

크래커들은 소프트웨어를 해체하는 사람들입니다. 일반적으로 게임을 포함한 대부분의 소프트웨어에는 불법복제를 막기 위한 락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불법복제를 하면 실행이 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크래커의 작업이 필요합니다. 크래커가 주로 하는 일은 락을 무력화시키는 ‘크랙’을 만드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크래커는 프로그램을 분석하는 역 엔지니어링과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에 능통하며, 그 특성 상 현실에서도 프로그래머 등의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영화나 음악을 릴리즈 하는 그룹이라면 크래커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는 아니지만, 게임 등의 소프트웨어를 불법복제 하는 릴리즈 그룹이라면, 크래커는 없어서는 절대 안 되는 구성원입니다.

취급책(Packager)

취급책이 하는 일은 크랙이 끝난 프로그램을 적절한 단위로 쪼개 ‘릴리즈’하는 역할입니다. 현실로 따지면 제품을 포장하는 사람 정도가 되겠군요. 소프트웨어 업계에서 말하는 ‘릴리즈’가 소프트웨어의 출시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법복제 커뮤니티에서 말하는 ‘릴리즈’는 크랙이 끝난 프로그램이 ‘풀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취급책은 ‘씬’의 엄격한 규칙에 맞춰 릴리즈를 실행하는 사람이며, 취급책이 프로그램을 잘못 릴리즈 했다면 해당 프로그램은 ‘누크’를 먹게 됩니다.

배송책(Courier)

배송책은 그 이름 그대로 릴리즈 된 프로그램을 전 세계에 퍼트리는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취급책이 적절한 규칙에 맞춰 릴리즈를 했다면, 이 릴리즈는 ‘씬’ 세계의 규칙에 따라 정식 릴리즈로 등록됩니다. 정식 릴리즈로 등록된 이후에야 프로그램은 인터넷에 풀릴 수 있으며, 이 때 중요한 하는 사람이 바로 배송책입니다. 배송책은 소수가 이용할 수 있는 FTP나 사이트를 통해 릴리즈 된 파일을 밑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릴리즈 그룹은 ‘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릴리즈 그룹이 없다면 지금처럼 내일 발매될 게임이 오늘 인터넷에 뜨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강력한 락이 불과 하루 만에 깨져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남의 저작물을 웹 하드에 올려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도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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