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7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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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서체'는 무엇입니까
[매거진 esc]
휴대폰 글꼴에서 서울시 글자체까지 생활 속으로 바짝 다가온 타이포그라피
한겨레
» (왼쪽부터)1. 에스케이(SK) 텔레콤과 애니콜의 휴대전화 서체. 2. 시각디자이너 성재혁의 작업. '조명디자인'에 집중한 전시에 맞춰 타이포로 빛의 배경을 표현했다.
"당신은 어떤 서체를 쓰십니까?"

'어떤 신용카드를 쓰고 어떤 아파트에 사는가'를 묻는 광고는 많다. 하지만 글자체와 당신의 관계를 묻는 질문은 많지 않다. 왜 그럴까. 특별히 시선을 끌지도 않을뿐더러 썩 중요한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여름 공포영화의 타이틀이 '분홍빛' 샤방샤방한 표정을 하고 있었더라면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 우리가 그토록 긴장했을까? 날카로운 선형에 새빨간 피를 흘리는 공포영화 서체나, 바위에 새겨진 '바르게 살자'의 굳건한 모습처럼 우리는 전달하려는 의미에 맞춰 '의도된' 글꼴 디자인 속에 살고 있다.

말하기 방식을 보완하는 하나의 수단

최근에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서체 디자인, 즉 타이포그라피(Typography)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분위기가 대세다. 그러면서 타이포그라피를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태도와 인식의 중요성을 말하는 목소리도 늘고 있다. 이같은 변화는 아무런 맥락 없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디자인 영역에서 '타이포그라피 비엔날레'와 타이포를 주제로 한 전시가 꾸준히 있었고 2~3년 전부터는 윤디자인, 산돌티움 등에서 개발한 휴대전화와 인터넷 서체가 일반인들의 소비욕을 자극했다.

잘 알려졌다시피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는 수천가지 서체의 향연이 펼쳐진다. 휴대전화 기종에 따라 '폰트친구'(SK 텔레콤),'나만의 폰트'(KTF) 를 살 수 있고 윤디자인이 내놓은 스타의 손글씨를 이용한 '스타폰트'는 감성마케팅으로 자리잡았다. 서체개발 회사 '활자공간'의 대표 이용제씨는 "서체는 소비자들에겐 즐거운 유희이자 사적인 기호품"이라고 말한다.

젊은세대는 자기 느낌 따라 글꼴을 선별해 사용한다. 미니홈피는 아예 '손으로 사각사각' '또박또박 단순하게' '질감을 살린'의 이름으로 느낌별 카테고리를 선보여 '느낌'의 중요성을 활용했다. 재미있는 건 '하트봉봉 이효리체' '투명유리 꼬마체' '빈티지 그레이 퍼니체'와 같이 아기자기한 글꼴이 주를 이루며, 손으로 그려낸 듯한 유연한 이미지가 강조된다는 점이다. 이는 이미지와 문자를 활용한 창의적인 발상이 자유로운 타이포그라피의 강점을 십분 살린 것이다. 대학생 정지은씨는 "다른 서체로 글을 쓸 때마다 뉘앙스나 표현 문구 자체가 달라진다"며 "내 말하기 방식을 보완하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말한다. 레포트를 작성할 때도 명조체나 돋움체는 상투적으로 느껴져 피한다.


» (위에서부터 차례로) 3. 타이포그라피 디자인 국제 공모전 수상작. 4. 서울시가 개발한 '서울한강체'와 '서울남산체'. 5. 싸이월드의 '이니셜'은 사용자가 글꼴을 직접 꾸미는 디아이와이(DIY)서체다.
이런 변화 한가운데, 타이포그라피(typography)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여전히 전문 용어에 가까운 타이포그라피는 일반인들에겐 낯설다. 타이포그라피는 문자에 느낌을 불어넣는 전반적인 디자인 작업을 총칭한다. 애초 15세기 구텐베르크가 일군 활판인쇄술을 의미했지만 이젠 한글 디자인, 서체, 글꼴, 칼리그라피(calligraphy) 등 세부적인 디자인 영역이 하위개념으로 들어온다. 예술인 동시에 기술이고, 상상력인 동시에 상품이다.


근래 타이포그라피에 대한 관심 아래 다양한 문제제기가 나온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한글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다. 우리나라 타이포그라피에서는 모국어인 한글에 대한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한글 디자이너'로 칭하며 '한글디자인연구소'를 꾸려왔던 이용제씨는 "이제 타이포그라피의 공공적인 측면에 주목할 때"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글자는 아주 개인적인 동시에 공적인 이중적인 얼굴을 가졌다"며 공공기관에서 서체를 만드는 일은 세심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한 공공재의 영역임을 지적한다. 이씨는 "만약 보기 싫은 글자체를 사회적으로 강요받는다면 얼마나 괴롭겠느냐"고 했다.

한옥구조의 곡선미에서 모티브를 얻다

실제 지난 7월15일 서울시에서 발표한 서울서체는 '한강'과 '남산'이라는 명칭으로 서울의 문화적 정체성을 내세워 이미지 만들기 효과를 노린 경우다. 발표된 서체는 명조계열인 서울한강체 2종과 고딕계열인 서울남산체 4종, 세로쓰기 1종으로 총 7종. 디자인서울총괄본부에 따르면 선비정신, 한옥구조와 기와의 곡선미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지금은 서울시 현판, 보행자 안내 사인, 공문의 헤드라인에 시범 적용되고 있다. 디자인서울총괄본부 공공디자인담당관 권은선씨는 "서울시 글자체는 아직 수정 중인 현재진행형 글자"임을 강조한다. 해외의 경우 영국 런던의 뉴 존스턴 서체, 프랑스 파리 지하철 전용 파리지엥 서체처럼 도시경관에 시각적 질서를 부여한 사례가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나라에도 도에서 제작했던 '전라북도체'가 있다.

근래 타이포그라피의 양상은 지극히 사적인 차원과 공적인 차원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 두드러진 특성이다. 타이포 전문가들은 "서체마다 최적화된 환경과 제 격에 맞는 꼴이 있기 마련"이라는 데 의견을 모은다. 보여주기 위한 '브랜드 만들기'가 아니라 다소 시간이 걸려도 기획 의도와 철학이 담긴 서체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제껏 웹과 휴대전화, 한글 문서 공간 안에서 마음껏 서체를 고르는 선택의 자유가 주된 관심의 대상 이었다면, 사회적 차원에서 약속된 디자인을 공유하는 '공공디자인'으로서 타이포그라피를 볼 권리 또한 중요하다.

스위스에서 타이포그라피를 공부한 디자이너 박우혁씨는 서체를 새로 만들거나 다루는 모든 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글자를 대하는 태도"라고 말한다. 영화포스터에서 손글씨를 사용하는 등 몇년 전부터 타이포그라피를 향한 대중적인 관심은 분명 증가했다. 하지만 타이포그라피에 대한 인식은 다소 표피적이었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낱말 '가나다'를 컵이나 옷 표면에 새기는 것만이 한글을 사랑하고 글자를 잘 다루는 것은 아니다. 박씨는 "글자를 만드는 것, 다루는 것, 공간의 질서를 잡는 것 등 글자를 재료로 하는 다양한 태도가 있다"며 "부족함이 많은 서체도 사용 방식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정병규 강좌와 국제 공모전도 예정

글꼴에는 '느낌'이라는 경쾌한 차원이 있어 답답한 문단 사이 한줄기 빛이 되는가 하면, 서울시에서 진행중인 서체와 같이 '공동체의 얼굴'이라는 책임도 있다. 근래는 타이포그라피를 감상하고 공부할 기회가 끊이지 않는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운영하는 '문지문화원 사이'(02-323-4207)에서는 9월18일부터 북디자이너로 유명한 정병규의 '한글과 타이포그라피 강의'가 진행된다. 9월6일부터 삼원 페이퍼갤러리(02-468-9008)에서는 실험적인 타이포그라피 작업을 볼 수 있는 타이포그라피 디자인 국제 공모전 이 열린다.

현시원 기자 qq@hani.co.kr

기사등록 : 2008-09-03 오후 07:28:59 기사수정 : 2008-09-07 오전 11:4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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